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자의 옥 (문단 편집) == [[건륭제]] 시기 == 강희제와 옹정제 시기의 문자옥은 일부 억지사례에도 불구하고 실제 반청복명사상에 기반한 사건을 청황조의 존립과 정통성 확보를 위해 당연히 처벌해야 할 일이 많았지만, 건륭제 시기에는 그냥 황권 강화를 이유로 조금만 빌미가 보여도 그걸 트집잡아 탄압하였다. 건륭제 시기 문자옥의 피해자들은 반청복명과는 거리가 먼 일반 순수학자나 시인이 대다수였다. 애시당초 건륭 연간은 명이 멸망하고 1세기나 지난 뒤라 반청복명 세력이 대규모로 있기도 힘든 때였다. 그냥 정권의 무자비하기 짝이 없는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한 핑계라고 보아야 더 합당할 것이다. 즉 [[공포정치]]의 수단이었다. 사실 건륭제는 처음부터 대대적으로 문자의 옥을 자행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즉위 초기에는 전대 문자옥의 죄인들의 후손을 사면하는 등, 엄격했던 부친과는 반대로 너그러운 정치를 표방하는 편이었다.[* 다만 건륭제 본인에게 자뻑 기질이 있었고 [[니오후루 허션]]의 부정부패를 방관했으며 훗날 저지르게 되는 문자의 옥으로 인한 피해자 중에도 부패한 관리보다 억울한 피해자가 훨씬 많았음을 감안하면, 건륭제 초기에 훗날과 같은 심각한 문자의 옥이 없었던 것도 당시의 건륭제가 착했다기보다는 그냥 아버지인 옹정제와 달리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엄격히 다스리는 데 관심이 없어서 그랬을 가능성도 있다. 만약 건륭제가 진정으로 남의 비판을 받아들일 줄 아는 성격이었다면 허션의 부정부패를 방관하지도, 문자의 옥으로 억울한 피해자들을 양산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옹정제 때의 문자의 옥 피해자들은 건륭제 때의 문자의 옥 피해자들에 비해 억울한 피해자가 훨씬 적었고 오히려 진짜 자업자득으로 피해를 본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을 복권시킨다는 건 결국 청나라 사회가 부정부패에 관대해지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건륭 15년(1750)에 이르러 손가감(孫嘉淦, 1683-1753) 사건이 터지면서 피바람이 불었다. 손가감은 강희 52년(1713)에 과거 급제하여 출사한 후 옹정, 건륭 3조에 걸쳐 요직을 역임하고 직언을 서슴치 않는 신하로 유명했다. 당시 공부상서 손가감이 썼다는 상소문 초고가 전국에 은밀히 퍼진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건륭제의 실정을 신랄하게 비판했는데 이른바 '다섯 가지 의혹과 열 가지 큰 잘못'이었다. 건륭제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나열한 글이라 당시 모두 소각되어 오늘날 그것의 전체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단편적인 자료에 의하면 건륭 12년(1747) 금천에서 사라분(莎羅奔, ?-1760)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지 못했는데도 건륭제가 대승을 거두었다고 허풍을 떨었으며, 천섬총독 장광사(張廣泗, ?-1749)의 공적을 가로채어 죽이고, 남방을 순행할 때 막대한 재원을 낭비하며 현지 백성들의 생업을 파괴했다는 비난이었다. 사실 완전히 틀린 주장은 아니었다. 금천 반란은 건륭 41년(1776)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진압했는데, 인구가 10만 명도 안되는 금천을 진압하는데[* 당시 금천의 인구는 7만이었다.] 60만이나 되는 대군을 투입하여 사상자가 수만 명에 달하고 은자 7천만 냥을 전비로 낭비한 까닭에[* 이는 당시 전투의 지휘를 맡은 청나라 장군들이 일부러 더 많은 전비를 챙겨 사복을 채우기 위해 조정에 계속 전비를 더 달라고 요청을 한 탓이었다. 그래서 일부 연구자들은 건륭제 때 벌어진 이러한 부정부패로 인해 청나라에 망조의 기운이 들었다고 보기도 한다.] 백성들의 불만이 없지 않았다. 거창하게 검집에서 천하명검을 뽑아 닭 한 마리를 잡은 꼴이었다.[* 다만 처음에는 대군을 보내지 않고 소수의 병력으로 정복했으나 금천의 원주민들인 [[좡족]]과 [[티베트인]]들이 청에 적대적이었고 그들이 합심하여 청의 지배를 거부하며 게릴라전으로 저항했기에 이 반란이 무려 30년이나 갔다. 그러다보니 사상자가 많이 나오고 피해도 커서 건륭제도 나중에는 대규모의 병력을 파견하고 유럽에서 들여온 대포로 무자비한 포격과 초토화 전술을 써서야 금천을 완벽하게 굴복시킬 수 있었다. 그나마 좡족과 티베트인은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고 저항하여 멸족된 [[준가르]]와 달리 청에 항복하고 복속한 터라 멸족을 피할 수 있었다.] 건륭 연간의 명장인 장광사도 금천 반란을 신속하게 진압하지 못했다는 죄로 참수형을 당했다. 하지만 재위기간 동안 남방을 여섯 차례 순행한 건륭제가 남방 순행 당시 막대한 재정을 낭비했다는 소문은 결코 사실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청감정이 남아 있는 남방의 민심을 달래기 위해 세금을 면제하기까지 했다.[* 실제로 이 시기 청나라는 재정이 매우 풍족했는데, 이는 아버지인 옹정제 덕이라고 할 수 있다. 옹정제는 지정은제를 시행했는데 이를 간단히 말하자면 세금의 은납화와 '''[[인두세]] 폐지'''였다. 정세를 지세에 통합하여(탄정입무) 인두세가 사라지니 사람들은 세금 부담이 줄어들자 호적에 오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줄어들게 되고 따라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인두세가 없어진 것이나 다름없지만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덕분에 세수는 늘어난 것. 강희 50년 당시 2700만 명 수준이던 청나라 인구가 건륭제 말에는 '''4억'''명까지 늘어났다.] 하지만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 했던가. 건륭 15년(1750)에 이르러서는 건륭제를 비난하는 요서가 중원지방 17개 성에 퍼졌다. 지방관리 유생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상인, 승려들도 그것을 몰래 베껴 읽어 보았다. 같은 해 6월 중원 지방에서 멀리 떨어진 서남 지방 귀주에서 현지관리에게 발각되었다. 운귀총독[* 운남성+귀주성 관할.] 석색은 즉시 밀절로 건륭제에게 보고했지만, 건륭제는 충신 손가감이 그것을 작성할 리 없다고 확신했다. 건륭제가 손가감을 의심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손가감은 건륭제가 즉위했을 때 《삼습일폐서三習一弊書》라는 상소문을 올려 건륭제가 폐단을 바로잡고 법률을 개정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또 수리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민생을 안정시키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능력 있고 청렴한 관리의 표본이었다. 요서 사건이 터지기 직전에는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라 건륭제에게 몇 차례 사직을 청하였지만, 건륭제는 그의 재능과 인품을 높이 평가하여 계속 중용했다. 건륭제는 손가감이 워낙 강직하고 청렴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어떤 자가 그의 명의를 도용하여 가짜 상소문을 만들었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 사건을 '위손가감주고안(僞孫嘉淦奏稿案)'이라고 부르는데 '가짜 손가감이 꾸민 상소문 사건'이라는 뜻이다. 손가감은 누명을 벗었지만 이 사건이 한창 파문을 일으길 때 사망했으므로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받았던 듯하다. 건륭제는 이 요서가 자신의 과오를 지적했기에 처음에는 비밀리에 범인을 색출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연루자가 늘어나자 사건을 더 감출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전국에 걸쳐 고발과 생포 열풍이 불었기에 요서를 몰래 읽어보거나 유통시킨 자들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조리 체포되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엉뚱한 방향으로 비화되었다. 관리들은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허위보고를 올리기 일쑤였고 백성들은 원한을 갚는 수단으로 악용하다 보니 도대체 진범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으며, 급기야 사법체계가 혼란에 빠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건륭제는 서둘러 사태를 진정시켜야 했고 평지풍파를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희생양이 필요했다. 건륭 17년(1752) 12월 강서순무 악용안(鄂容安, 1714-1755)이 천송 노로생(盧魯生)이 진범이라고 상주했다. 다음해 2월 노로생은 북경으로 끌려와 능지처참에 처해졌다. 요서를 베껴서 읽어본 일반 백성들은 사면했지만 지방관리들은 엄벌에 처했다. 건륭제는 이 사건을 처리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특히 청나라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는 한족 유생과 겉으로는 복종하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배반하는 관리들이 아직도 전국에 산재했다고 생각했다. 또 재위 초기에 인의와 관용으로 백성을 다스리고 언로를 열어주었기 때문에 감히 신성불가침의 황제와 조정을 비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도 생각했다. >그 간악한 무리가 유언비어를 전파하고 거짓으로 남을 속이는 악행이 풍습과 민심에 미치는 영향이 심대하므로 어쩔 수 없이 무력으로 바로잡겠다. 앞으로 청나라와 자신의 통치에 조금이라도 불만을 품은 자들에게는 철권을 휘두르겠다는 엄포였다. 이때부터 건륭제는 유생들이 지은 시문이나 저서에도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건륭 18년(1753) 호남순무 범시수(范時綬, ? ~ 1782)가 무과시험을 주관할 때 무주부의 생원 유진우(劉震宇)가 찾아왔다. 그는 한평생 과거에 응시했지만 번번이 낙방한 70세 노인이었다. 치국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좌리만세신평신책佐理萬世治平新策>이라는 책을 범시수에게 주고 황제에게 바치기를 간청했다. 행여나 황제가 그것을 읽고 감동하면 자신도 벼슬길에 나가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었다. 범시수는 그것을 읽고 깜짝 놀랐다. 내용은 엉터리였을 뿐만 아니라 한족의 전통복장이 만주족 복장으로 바뀐 일도 감히 언급했기 때문이다. 사실 유진우는 황제의 성은을 찬양했을 뿐 청조를 비방한 내용은 전혀 없었다. 다만 유진우가 인용한 경전의 주석이 일부 틀리고 신분에 맞지 않는 표현이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범시수는 오히려 이를 [[침소봉대]]하여 광탄으로 결론지었으며, 미친 자가 감히 거짓을 늘어놓았다며 즉시 유진우를 잡아 문초했다. 우물쭈물하다가는 자신에게 불똥이 튈 게 분명했다. 나중에 건륭제에게 전말을 보고하자 그의 비답은 이러했다. >그자는 학당의 생원이고 더욱이 무지몽매한 백성이 아닌 데도 감히 거짓을 늘어놓고 국가의 제도를 헐뜯었다. 마음 속으로 패악하고 불순한 생각을 품고 있음이 분명하다. 당장 참수형에 처하고 서적과 판본은 모조리 불태워라. 유진우가 그토록 바라던 출사의 길이 글 하나 때문에 황천길로 바뀐 것이다. [[강희제]], [[옹정제]] 시기에는 그래도 명사집략 사건이나 대명세 사건[* 칭제건원에서 보듯 연호의 제정은 대표적인 정통황제의 상징과도 같아서 명나라 참칭황제의 연호를 사용함은 청의 지배를 대놓고 부정하는 일이다. 조선의 성리학자 중에도 완전히 같은 이유로 숭정 혹은 영력 연호를 사용한 이들이 있었다.]처럼 청조의 지배 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일이거나, 증정 사건처럼 분명한 반란 모의를 중심으로 탄압했기에 어느 정도 수긍 가능한 측면이 있었지만 [[건륭제]] 시기에는 그냥 일반인들이 실수로, 또는 별다른 의미없이 쓴 단어 하나하나까지 [[확대해석]]해 트집을 잡으며 닥치는 대로 탄압하니 그 사례가 너무 많아 일일이 다 못 적을 지경이 되었다. 대표적으로 신건현 출신 호중조(胡中藻, 1712~55)라는, 내각학사를 지낸 조정 중신이자 문인이 건륭 20년(1755)에 시집 《견마생시초堅磨生詩鈔》를 내놓았는데,[* 여기서 초(鈔)란 한자는 '간추린 문집'이란 뜻이다. 즉 시집의 이름은 '견마생시'인 것이다.] 그 중 일파심장논탁청(一把心腸論濁淸, 한 줌 마음으로 흐림과 맑음을 논하고 싶구나)이라는 시구에서 '흐리고 맑음'이라는 뜻으로 탁청(濁淸)이란 문구를 쓴 것이 문제가 되었다. 본래 한시에서 사성법과 각운법에 맞추기 위해 청탁을 탁청으로 바꾸는 경우가 있었으므로 지극히 일반적인 문법이라 할 수 있지만, 하필이면 국호인 청 앞에 부정적 글자인 탁을 썼다는 사실이 문제가 되었다. ~~그럼 국호를 청이라 하지 말든가~~ 더해서 일세일월무(一世日月無, 이 세상에 해와 달이 없다)라는 시구는 일(日)과 월(月)을 합치면 명(明)이 되므로 명나라의 멸망을 슬퍼했다는 혐의까지 덮어씌워져 호중조는 반역혐의로 처형되었다. [[강희자전]]을 두고 [[피휘]]하느라 너무 어려운 문자를 썼다고 한탄했다가 반역죄로 목이 날아간 사람도 있었으며, 그보다 더 막장인 사례로는 '''[[순치제]]''' 시기의 시인이 쓴 구절에 순치제보다 후대인 [[건륭제]]의 시호와 어명을 [[피휘]]하지 않았다고 그 시인의 '''현손'''이 끌려와 고문을 겪었다.[* 다만 이 건은 당대의 관념으로는 시비거리가 될 수도 있었다. 청나라 이전에도 후대 제왕의 피휘를 위해 후손이 선대의 글을 고치는 일도 있었기 때문. 그냥 보고 넘어가는 때도 있었지만 피휘를 엄히 지키자면 충분히 따질 수 있었다.] 거인 왕석후(王錫侯, 1713-77)는 고향 신창현에서 17년 동안 각고의 노력 끝에 건륭 40년(1775)에 <자관字貫>이라는 자전을 완성했다. 그가 이것을 집필한 목적은 강희제의 칙명으로 편찬한 강희자전에서 수록한 글자가 4만 7천여 자나 되었지만 글자의 의미를 체계적으로 나열하지 않은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였다. 이를테면 자관에서는 나무 목자를 풀이한 뒤 목판, 목재, 벌목 등 목자와 관련이 있는 단어를 설명했다. 또 전서를 천문, 지리, 인사, 물류 등 네가지 부류로 나누고 40권으로 편찬했는데, 강희자전보다 내용이 일목요연하고 간단한 장점이 있었다. 그런데 반평생 심혈을 기울여 쓴 책이 비수가 되어 자신을 찌를지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왕롱남(王瀧南)이라는 고향 사람이 왕석후가 감히 강희자전을 비평하고 멋대로 고쳐 <자관>을 출간했다고 강서순무 해성(海成)에게 고발했다. 해성은 즉시 건륭제에게 사건의 전말을 보고하고 증거물로 자관을 바쳤다. 건륭제는 그것의 서문 뒤에 수록한 범례를 보고 분노했다. 강희제, 옹정제의 시호와 자신의 이름에 들어간 글자를 다른 글자들과 나란히 나열했기 때문이었다. 봉건왕조 시대에는 [[피휘]]의 관습에 따라 군주의 시호나 이름에 들어간 글자는 절대 쓸 수 없었고, 이를 어기면 큰 불경이었다. 건륭제의 이름은 아이신기오로 훙리, 독음은 애신각라 홍력(愛新覺羅 弘曆)이다. 홍력이 황제로 등극한 후에는 이미 홍(弘) 자와 력(曆) 자를 이름으로 쓴 사람은 반드시 개명해야 했다.[* 굳이 홍 자와 력 자가 아니더라도 그 자와 비슷한 음을 썼어도 개명해야 했다. 당시 조선에서도 건륭제의 이름의 음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삼전도비]]에 기록된 [[강홍립]]이 강황래로 개명되었다. 조선이 이 정도였는데 청나라 본국이었다면 볼 것도 없다.] 이 때문에 왕석후는 참수,[* 원래는 능지처참이었으나 참수형으로 감형되었다.] 자손 6명도 사형에 처해졌으며 친족 21명은 연좌제에 걸려 처벌을 받았고 자관도 금서로 지정되어 소각, 부녀자와 미성년자들은 모두 노예로 전락했다. 한자를 익히는 자들에게 도움을 줄 목적으로 펴낸 책 때문에 왕석후 집안은 멸족을 당한 것이다. 병다진 사람인 거인[* 擧人. 향시를 통과한 사람.] 서술기(徐述夔, 1701-63)가 병으로 사망했다. 아들 서회조는 부친이 남긴 시를 정리하여 <일주루시집一柱樓詩集>을 출간했다. 아버지의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기리고 입신양명하지 못한 울분을 풀어주기 위해서였다. 서회조도 건륭 42년(1777)에 병사했다. 그런데 서씨 일가가 거주하는 병다진에는 남생 채가수(蔡嘉樹)라는 자가 있었다. 서씨와 채씨는 병다진의 토호였는데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느 날 채가수와 서회조의 아들 서석전이 토지를 거래하는 일로 심하게 다투었다. 건륭 43년(1778) 채가수는 서석전이 자신의 요구를 끝내 거절하자 악감정을 갖고 서씨 집안을 멸족시키기 위해 《일주루시집》이 청조를 비방한 내용으로 가득하다고 관가에 고발했다. 건륭제는 《일주루시집》을 읽어보고 경악했다. '가짜 손가감 사건'을 계기로 반청감정을 담은(?) 글을 쓴 자들을 열심히 쓸어냈음에도 아직도 이런 반역의 시가 돌아다니니 제2의 서술기가 언제든 나타날 수 있고, 청 왕조의 정통성에 심각한 훼손을 끼칠 수 있다고 보았다. 《일주루시집》에서 문제시된 시구는 총 3구절이었는데, "맑은 바람은 글자를 모르는데 어찌 책장을 어지럽히는가."(淸風不識字 何故亂翻書)라는 구절은 독서를 하는데 자꾸 바람이 불어 책장이 넘어가는 모습을 재미있게 표현한 시구였지만 건륭제는 청풍불식자(淸風不識字)를 '청나라 사람들은 글자도 모르는 야만족'이라고 비난하는 시구라고 해석했다. 그리고 "술을 마시면서 영명한 천자를 홀연히 만나니 잠시 술병을 옆자리에 치운다네."(舉杯忽見明天子且把壺兒抛邊)라는 구절은 술을 마시다 천자를 만나 감읍하여 술병을 치우고 천자를 배알한다는, 천자에 대한 일편단심을 표현한 시구였지만 건륭제는 명천자(明天子)는 명나라 천자이며 호아(壺兒)는 호아(胡兒) 즉 오랑캐와 발음이 같으므로 서술기가 망한 명나라 군주를 흠모하면서 자신을 오랑캐로 비난한다고 해석했다. "내일 아침 새처럼 휠휠 날아 단번에 천궁으로 가고 싶다네."(明朝期振翮 一擧去清都)라는 구절은 사대부들이 속세를 떠나 이상향으로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을 표현한 시구였지만 건륭제는 이를 언젠가 명조가 부활하여 일거에 청조의 도성을 쓸어버리리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건륭제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이미 사망한 서술기와 서회조의 시신을 무덤에서 꺼내 부관참시하고 수급을 저잣거리에 내걸었다. 서술기의 두 손자는 할아버지의 저작과 유고를 모두 관가에 바치고 자수했는데도 그것을 은닉한 죄로 참수형을 당했다. 병다진에서 대대로 떵떵거리며 살아온 서씨 일가 가운데 16세 이상 남자는 모조리 살해당하고 아녀자들은 모두 노예로 전락했다. 극적으로 살아 남은 자들은 성씨를 고치고 고향을 떠나 숨어 살아야 했다. 심지어 서술기의 두 제자 서수발(徐首髮)과 심성탁(沈成濯)도 대역죄로 처형되었는데, 건륭제는 둘의 이름을 합친 수발성탁(首髮成濯)에서 머리카락을 뜻하는 터럭 발(髮) 자와 필 발(發) 자는 발음이 같으니 수발성탁은 '머리카락을 물로 씻어 깨끗해졌다.'는 뜻으로, 이는 곧 [[변발]]을 우회적으로 비난하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말도 안 되는 억지였지만 누구도 감히 황제에게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건륭 48년(1783) 이일(李一)이라는 자가 지은 호도사(糊塗詞)에 "하늘도 땅도 흐리멍텅하고 제왕과 장수, 재상도 흐리멍텅 하지 않은 자가 없다."(天糊涂, 地糊涂, 帝王帥相, 無非糊涂)는 구절이 있었는데, 등봉현 사람 교정영(喬廷英)이 고발했다. 그런데 그의 시고에도 "천추의 세월동안 신하의 마음은 오직 한 왕조의 하늘에 떠 있는 해와 달이네."(千秋臣子心, 一朝日月天)라는 시구가 있었다. 일(日)자와 월(月)자를 합하면 명나라를 뜻하는 명(明)자가 아닌가 하여 이일과 교정영 두 사람 모두 모반죄로 능지처참을 당했다. 건륭 연간에 호(胡), 융(戎), 이(夷), 노(㺐), 적(狄) 등 오랑캐를 뜻하는 글자를 무심코 썼다가 문자옥에 연루되어 죽은 자들이 부지기수였다. 심지어 탁장령이 펴낸 회명시집의 회명(懷鳴)의 명(鳴)자가 명(明)자와 발음이 같으므로 망한 명나라를 그리워했다는 죄로 멸문의 화를 당했다. 산서성 생원 왕이양(王爾揚)은 남의 부친의 묘지명을 지을 때 황고(皇考)라는 두 글자를 썼다. 원래 이는 돌아가신 부친을 남 앞에서 높여 부르는 말인데, 선고(先考)라고도 한다. 예법에 맞았으므로 남의 선친을 황고라고 표현해도 문제될 게 없었지만, 감히 임금 황(皇) 자를 썼다고 해서 처형을 당했다. 강소성 생원 위옥진은 선친의 행적을 기록한 글에서 황제만이 쓸 수 있는 사면할 사(赦) 자를 썼다는 이유로 곤장 3백 대를 맞고 3년 동안 복역했다. 호북성 생원 정명인은 남에게 생일 축하의 글을 지어주었다가 글 가운데 '창대업'이라는 세 글자 때문에 능지처참을 당했다. 직예성 고읍현 사람 지천표(智天豹)는 병을 치료하는 의원이었는데, 청나라 황실에 잘 보여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대청천정운수大淸天定運數》라는 청나라의 만년력을 편찬했다. "주나라 천하는 8백여 년 동안 지속되었지만 오늘날 대청의 국운은 주나라보다 훨씬 오래 갈 것이다." 청나라 황실이 영원히 번영을 누리리란 아부였다. 그런데 이 책에서 건륭 연간이 재위 57년(1792)에 끝난다고 기록했다. 지천표는 건륭제가 빨리 죽어야 한다고 저주했다는 대역죄로 극형에 처해졌다.[* 다만 이 부분은 건륭제의 심정도 이해할만한 측면도 있는데 원래 현임 군주의 수명 운운은 당연히 예의에 맞는 말이 아니다. 물론 건륭 57년은 건륭제가 81세 되는 때이니 '여든 살까지 장수하십시오' 하는 말로 해석할 수 있고, 당시로서 여든은 엄청난 고령이었으므로 좋은 뜻이긴 하다. 하지만 어쨌거나 사람 수명, 그것도 '''황제''' 수명을 운운한 것은 40, 50 같은 나이면 그냥 저주고 이 케이스처럼 80은 황제에 따라서는 관대하게 '나보고 장수하라는 뜻이구나' 라고 받아들일 수도, '나보고 팔십까지만 살고 죽으라고?" 라고 불쾌히 받아들일 수도 있는, 말하자면 복불복 케이스였다. 간단히 예시를 든다면 [[불로불사]]를 꿈꾸었던 진시황 앞에서는 이 말이 저주일 것이다. 그러나 요절과 짧은 재위기간이 많았던 한나라나 사마씨 진나라 황제들에게는 장수를 축원하는 말처럼 들렸을 것이다. ~~불합리해보이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니가 황제 되든가로 귀결된다~~ 그래도 여든이 당시로선 보기 드문 장수라는 것과 전체적으로 어쨌든 아부성 멘트라는 걸 감안하면 대역죄 씌우고 극형까지 내린 건륭제의 처사는 많이 지나쳤다.] 이런 사례처럼 친청파 지식인들도 문자옥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전국시대 [[상앙]]도 비슷하게 자신의 신법을 칭송하는 사람까지 처벌하여 아예 평가 자체를 근절시킨 일이 있다.] 급기야 명백한 미치광이의 헛소리에까지 '정신이 멀쩡할 때라면 어떤 발칙한 마음을 품을지 알 수 없다.'는 이유로 처형하였다. 이쯤 되면 아예 찬성이든 비판이든 생각 자체를 하지 말고 고분고분 황제에 순종하기만 하라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 막장행태의 예를 좀 더 들어보자. [[강소성]] 사람 심덕잠(沈德潛, 1673-1769)은 건륭제의 조정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원로대신이자, 궁정 문인으로 건륭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강남 출신 문인의 수장'이라 불릴 정도로 문필로 덕망이 높았기 때문에, 건륭제가 강남 순행을 떠났을 때 심덕잠을 네 번이나 불러 만났을 정도였다. 심덕잠은 무려 67세 고령에 진사로 급제하여 인생의 마지막 30년 동안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다. 건륭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궁궐의 후원까지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시인' 건륭의 자작시를 수정해주고, 심지어 건륭제의 명의로 시를 대필해주기도 했다.[* 건륭제는 시를 좋아하여 평생에 걸쳐 4만 수를 넘게 지었지만 수준은 별로였다. 후세에 조조의 시는 몇십 편밖에 안 남았지만 하나하나가 명문인데 반해, 건륭제의 시는 많이 남았지만 도서관 구석에나 꽂혀 있을 뿐이라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 늘그막에 복이 넘쳐나자 심덕잠은 그만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말았다. 자신의 시집에 황제를 대신해 지었던 시는 물론 수정해준 시까지 모두 수록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사실이 심덕잠 사후 10년 뒤에 밝혀지자, 자존심과 허영심이 남달리 강했던 '시인' 건륭제는 격분했다. 건륭제는 우선 심덕잠의 유족들에게 그의 작품들을 다시 읽고 싶으니 어서 집에 남아 있는 시들을 보내달라고 명했다. 건륭제는 눈에 불을 켜고 심덕잠의 시집을 읽은 끝에 <검은 모란을 읊다>라는 시에서 "바르지 않은 색이 붉은 색(朱)을 빼앗고, 다른 종자가 또 왕이라고 칭한다." 하는 구절을 찾아냈다. 붉을 주(朱)자는 명나라의 황성이었으므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란 식으로 반역죄를 물을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심덕잠은 무덤이 파헤쳐져 해골의 목이 베어져서 효수되고, 하사된 모든 관직과 재산이 박탈되었으며 무덤의 비문까지도 모두 깎아서 지워버렸다. 이런 사건은 그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북경 고궁박물원 문헌관에서 엮어낸 《청대문자옥당》에 의하면, 건륭제 재위기간 중 비교적 큰 문자옥 사건만도 64건이 넘었다. 그 중에서 47건은 죄인이 극형을 받았다. 산 자는 참수당하고, 죽은 자는 부관참시당했으며, 일가친족 중 15세가 넘는 남자들까지 모두 연좌되어 목이 달아났다. 없는 죄를 뒤집어씌우고 생트집을 잡아 무고한 이들을 죄인으로 몰아가는 문자옥이 중국에서 고삐 풀린 말처럼 미쳐 날뛰었다. 그래서 문자옥 때문에 중국의 선비들은 공포에 질려 세상 일에서 관심을 떼고 고서만 죽어라고 파고들어야 했다. 이런 이유로 건륭제 후기부터 가경제 시대까지 [[고증학]]이 중국에서 대단히 성행했다. 선비들은 아주 오래 전의 고서에서 문장 한 구절, 글자 한 글자를 찾아낸 다음, 역시 오래된 고서들을 두루 참고해 대단히 치밀하고 꼼꼼하게 구절과 글자의 음과 뜻을 점검하는 일로 소일했다. 고증학이 유행하다 보니 이런 일까지 벌어질 정도였다. 어느 날 절강순무 완원(阮元, 1764-1849)[* 옹방강(翁方綱) 등과 함께 [[김정희]]에게 고증학을 전수한 그 사람 맞다.]의 제자 한 명이 북경으로 항했다. 그러다 북경의 교외인 통주에서 간식거리로 떡을 하나 샀는데, 떡 뒷면에 마치 글자 같은 무늬가 있었다. 장난기가 발동한 그 제자는 그 떡을 종이에 탁본해 완원에게 부치면서 이렇게 썼다. >고서의 명문이니 부디 스승님께서 고증을 해주십시오. 이렇게 해서 떡 탁본 하나를 놓고 절강성 제일의 선비 여러 명이 한 자리에 모였다. 난상토론이 벌어지는 촌극 끝에, 결국 절강성 순무 완원이 총대를 메고 결론을 내려야 했다. 완원은 제자가 보내준 탁본이 <선화국보>라는 책에 등장했다고 아주 자신 있는 어조의 답장을 보냈다. 답장을 받은 제자로서는 웃지도 울지도 못할 일이었다. 이처럼 현실과는 동떨어진 글장난이 당시의 중국에서는 중요한 학문으로 취급되었던 것이다.[* 왕중추 저 <중국사 재발견> 中] 특히 사고전서 편찬 때문에 건륭제 시기 문자의 옥은 극에 달했다. 건륭제는 사고전서 편찬을 위해 전국의 모든 서책과 기록을 긁어모으라 지시하고 그 가운데 청조에 조금이라도 비판적이거나 불리한 기록은 모조리 불태웠다. 단순히 당대의 서책와 기록만이 아니라 명 말엽의 기록들도 대상이었다. 예를 들어 명 말기 장수들이 여진족과 후금/청을 상대로 이민족/오랑캐/반란군이라 쓴 표현이 있으면 모조리 없애 버렸다. 명 말기 명의 장수가 명의 황제에게 하는 보고이니 당연히 청군을 오랑캐라 표현했는데, 그걸 없애버렸다. 간혹 당대의 기록에 그런 말이 보이면 즉시 저자는 숙청당했다. 결국 탄압이 이처럼 가혹하고 온갖 트집을 잡으니 청나라에서 정상적인 문학 창작 활동이나 학문 연구가 발전할 리 없었다. 당대 지식인층은 아예 교우 목적의 서신조차 보내기를 꺼렸고, 설령 서신을 주고받더라도 읽고 나서 곧바로 태워버리는 지경이었다. 서신의 내용이 정말로 불순해서가 아니라 어디서 어느 글자를 빌미로 어떻게 트집 잡힐지 몰라서였다. 일례로 청나라에 갔던 [[조선]] 사신들이 당대의 문인들과 교류할 때 [[필담]]으로 교류를 했는데, 이들도 대화가 끝나고 곧장 종이를 태워버렸다고 한다.[* [[연암 박지원]]도 사행길을 따라 연경에 갔을 때 필담으로 청나라 지식인 여럿과 교류했는데 그중에 알게된 윤가전이란 명사와도 깊은 교분을 나누었다.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에 따르면 "아는 건 많은데 사람됨이 좀 주책맞고 허영심이 넘치는 노인"이었다고. 윤가전은 박지원과 헤어지고 그 다음해 건륭제에게 건방지다는 죄목으로 꼬투리를 잡혀 과거에 쓴 글이 빌미가 돼 목숨이 날아갔다. [[열하일기]] 항목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